망량의 상자 - 하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사철나무)
요코미조 세이시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전자는 모두 대출중 ㄱ-, 후자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히로스에 료코가 나오는 [비밀]의 원작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읽은 건 아직 [용의자 X의 헌신] 뿐)을 알고 흐느작흐느작, 마침 그 아래 서가에 있던 망량의 상자 두 권을 집어왔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만발했던 소설이니만큼 망설이지 않고 집어왔는데
...엄마야
접습니다
[레몬 머랭 파이 살인사건]을 함께 빌려온 것이 매우 다행이다. 애초 계획대로 [듄의 신황제] 같은 것을 빌려왔더라면 개천절 하루종일 나의 정신이 매우 피폐해졌을 것이다.
소설 자체는 이제까지 내가 읽어본 몇 권 안 되는 일본 추리소설의 대략적인 스타일과 별로 다르지 않다. 누가 범인인지도 머리를 좀 굴리면 알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도 금방 눈치챌 수 있고, 범인 기타 인물들의 사정과 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던가, 별 상관없을 수도 있는 소재를 솜씨좋게 늘어놓아 그 사이를 메꾼다던가...
상권의 첫 장을 폈을 때 떠올랐던 생각이 하권 마지막장을 덮을 때 "너무나 문자 그대로" 맞아떨어졌음을 확인하고 어이가 없었다.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 상황이 반전되고, 머리를 굴려 작가에게 대항해보고, 이런 류의 즐거움이 전혀 없이, 두꺼운 책 두 권을 읽는 내내 그냥 작가에게 괴롭힘당한 느낌이다. 뭐야 이게! 다 알 것 같은데(게다가 기분좋은 사실이란 하나도 없다) 그냥 질질 끌려다니는 이 기분. 게다가 독자가 끌려다니는 필드에는 도처에 피투성이 팔다리가 널려 있지 않은가. 매우 기분이 나쁘다! ㅠㅠ
하지만 그러면서도 책을 중간에 덮어버리는 것은 생각도 못 할 만큼 재미있긴 했다. 상하권 중 상권만 수리제본되어 있는 걸 보니 중간에 읽기를 포기한 사람도 꽤 있는 모양이긴 하지만;;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지점에서 시작한 사건들이 얽히는 과정도 자연스러운 편이고, 그 중심에 있는 교고쿠도라는 인물의 기괴함과 비범함;이 오히려 그 자연스러움에 득이 되는 느낌이다. 사실 작중화자를 비롯한 여러 캐릭터의 매력은 제대로 살아 있는 편이 아니지만 필요한 부분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다른 시리즈물도 있는 것 같으니 이 인물들의 매력은 다른 작품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생각한 것 같지 않은 악랄한 소재, 치밀한 구성, 장황한 배경지식 등에 비해 마지막 부분이 시시하게 끝나 버린 감이 있지만 어차피 추리소설이라면 사건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크게 불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고... 시리즈가 하나인가 둘이 더 있었던 것 같고 얼핏 도서관에도 들어와 있었던 것 같은데, 조만간 빌려와서 읽어봐야겠다. 함께 빌려올 좀 가볍고 발랄한 소설을 리스트 업 한 후에...
+ 전쟁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게 맞긴 맞는 모양이다. 이 책에는 주요 소재가 되는 미마사카 연구소 외에 전후의 사회가 어떠한지에 대한 서술이 많이 드러날 여지는 없지만, 인물들이 전쟁 때 어떠한 역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부분부분의 서술들과 더불어, 작품 전체에서 전쟁이 사람과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비정상적인 발상은 사실 이제까지 여기저기에서 접한 일본산 괴담들과, 그를 주/부 소재로 삼은 일본 작품(주로 만화가 아닐까)에서 종종 접했던 것이다. 나치가 UFO를 만드네 하는 색바랜 음모론들까지 떠올려 보면, 전쟁을 하면서 인간의 의식은 여기까지 퇴화하는 것인가 싶어서 조금 씁쓸해진다. 아니 퇴화가 아니라 SF로의 진화인가? 솔직히 이 정도면 SF... 공상과학 맞지 않나;
+ 중간에 읽기를 포기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권도 곧 수리제본해야 할 듯한 상태다. 진짜로 중도포기자가 많은 소설은 [듄] 시리즈인 듯 하다. 1,2부의 책들은 꽤 너덜너덜한데, 좀 건너뛰어 5,6부쯤 가면 거의 새 책이다. 웬만해서는 읽기 시작한 책을 놓지 않는 나조차 3부 9권까지를 다 읽은 지금 중도포기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건 뭐 SF인지 구도소설인지... 살짝 18권을 펴 보고 좌절하고 말았다. 3부까지 두 번이나 죽은 사람을 또 살려놓다니 작가는 변태인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빌려올 생각이었는데, 얇은 주제에 두 권인데다가... 펴 보니 색색깔로 줄이 쳐져 있더라. 어떤 변태의 손이 거쳐갔을지 모를 그 책이 매우 불쾌해져서 읽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롤리타]를 읽는다고 변태란 뜻은 아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색색으로 줄을 치면서 읽는 놈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변태인데 그 책이 하필 [롤리타]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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